플라스틱 용기에 부착된 라벨(label)을 한번 분리해 보았다. 달라붙은 종이부분이 잘 분리되지 않는다. 물에 담갔다가 해도 마찬가지다. 칼로 문질러야 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재활용품을 제대로 버리기가 어렵다. 코로나19시대, 주위에서 맛있다고 해서 OOO찜을 하나 시켰다. 그런데 비닐·플라스틱으로 된 겹겹의 포장이 너무 많아 놀랐다. 죄를 짓는 것 같았다. 그릇을 문밖에 내놓던 시절에 비해 윤리는 퇴보한 것 같다. 재활용품을 배출할 때는 '비행분석'을 해야 한다고 한다. ①비-비운다 ②행-헹군다 ③분-분리한다 ④석-섞지 않는다(재질이 다른 것). 3단계 '분리'가 쉽지 않은 게 많다. 왜 플라스틱 용기에 풀이 딱 달라붙도록 라벨을 붙였을까. 잘 버릴 수 있도록 생산자가 생각해서 생산을 했으면 좋지 않았나 싶다.

대구시내 곳곳에 차단벽이 설치돼 있다. 그 안에서 집들이, 건물들이 부수어진다. 정겹던 골목도 도로도 사라진다. 부술 때는 이유는 있을 것이다. 오래되고 낡아서 생활하기 불편하여 새로 짓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살던 건축문화를 투기(투자)대상으로 보고 너무 쉽게 부순다. 사오백년도 아니고 사오십년 안 돼도 부순다. 멀쩡한 건물도 마구 부순다. 1997년에 완공된 20층짜리 대동은행 건물이 대표적이다. 29층짜리 주상복합으로 바꾸기 위해 2019년 부숴버린 것이다. 이 같은 행위가 정상적인 건축행위인가. 이제 태어난 집도 살던 집도 없다. 집이 없으니 동네도 역사도 없다. 기억도 가물가물 한다. 구획정리하여 택지를 조성한 수성들 그 양지바른 주택들도 부수어지고 있다. 부수게 됐다고 동네에 현수막이 붙는다. 관청은 자꾸자꾸 부수어라는 듯 허가해준다.

부산에는 보수동이 있다. 보수동 위쪽에 동아대가 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가끔 둘러본 곳이다. '진보-보수'라는 이념에 익은 터라 그 이름이 노골적이어서 재미있게 다가왔다. 보수들이 사는 동네처럼. 그러나 한자로는 보수동(寶水洞), 천박한 상상력을 보수(寶水)로 씻어주는 듯했다. 보수동 네거리에서 안쪽은 헌책방 골목이다. 헌책은 헌책대로 고결한 품격이 있다. 찾는 이들을 푸근하게 해준다. 대구에도 헌책방 골목이 있었다. 옛날 대도극장 뒤, 대구시청 옆 네거리, 지하도, 공평네거리에 줄지어 있었다. 그러나 그 많던 헌책방들은 거의 없어졌다. 대구시청 옆에는 대륙서점, 평화서적, 동양서점 3점포가 명맥을 이어왔다. 그러다가 재작년 9월 '대륙'은 70년 만에 폐업하였다. 이 서점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따님이 운영하다 재개발로 없어질 위기에 놓이자, 중구청을 찾아갔다고 했다. 허사였다.(평화뉴스 1월5일자 보도)

'서점도 문 닫는 판에 헌책방이야!'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헌책방은 우리가 보존해야 할 지식의 보고가 아닌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나무'에서 '노인 하나가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이라고 애석해 했듯 헌책방이 죽는 것도 애석한 일이다. 없애기는 쉬워도 복원하기는 어렵다. 김광석거리처럼 헌책방 골목을 살릴 수는 없을까.

대구시 동구 중대동에 대한수목원이 있다. 수목과 수석이 잘 가꾸어진 수목원 건물 2층에는 아담한 개인박물관이 있다. 70대 후반의 주인이 살아오면서 같이 살았던 소지품 같은 물건들을 전시해 놓았다. 옷핀, 단추, 시계, 교복 명찰 밑에 달았던 '원호의 달' '불조심' '쥐를 잡자' '규탄하자 북괴만행'과 같은 리본들. 그리고 한 작은 접시에 소복하게 놓인 1센티도 안 되는 몽당연필들. 이 사물들이 그 옛날을 되살리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인다.
유영철 (45회,고21회) 전 영남일보 편집국장